열린마당

안동의 전통문화를 지키고 새롭게 재창조하는 안동문화원

안동이야기

우장군과 말무덤

작성자 정보

  • 작성자 안동문화원
  • 작성일

컨텐츠 정보

본문

 안동, 예천, 영주의 3개 군의 경계이고 인근 고을에서 영산으로 널리 알려진 학가산 서편 보문산의 험준한 산줄기를 타고, 서남쪽으로 약 8㎞가면 안동군 풍산면 신양동 〔창마을〕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에 지금으로부터 350여년 전 이조 인조 시대에 우홍구라는 사람이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은 청빈을 생활의 신조로 삼는 가난한 선비라 마을 소년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것을 낙으로 삼고 새활해 오던 중 나이 50에 셋째 아들 영진을 분만하였다. 
 

 영진은 태어나자 마자 걸어다녔다고 하며 기골이 장대하고 영리하여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신동으로 4살 때 벌써 큰 아이들이 책읽는 것을 옆에서 듣고 그대로 따라 외었다고 한다. 더욱 놀라운 일은 7살 때 벌써 동리 씨름판에서 당할 사람이 없었으니 날 때부터 장사의 기골을 타고 났던 모양이다. 때는 연산군의 폭정, 인조 반정, 병자호란 등으로 나라가 매우 어지러울 때라 영진은 장차 훌륭한 장사로서 나라를 구하겠다는 원대한 포부를 갖고 남모르게 무술을 수련하였다.
 

 한편 영진의 부모 우홍구 내외는 아들의 비범한 재간을 보고 장차 커서 나라를 어지럽게 하여 집안에 후한이 있을까 두려워 늘 무술 수업을 중지하기를 권하였다.


 아침에 일어나면 마을에서 8㎞나 되는 학가산을 단숨에 뛰어 갔다와서 아침을 먹었으며 밤이면 마을앞 느티나무를 몇 번씩 뛰어 넘고 냇가에 약 200m 거리를 두고 수레바퀴 만한 바위 2개가 있으니 이 바위는 우 장군이 돌던지기 연습을 하던 바위라 전해지며 이 바위를 우장군이 공깃돌과 같이 가지고 놀았다하여 우장군의 공깃돌이라고도 부른다. 영진이 나이 19세 되던 해 힘이나 무술의 재간이 비범한 경지에 도달하였다. 때마침 나라는 인조 임금이 청나라에 굴복하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들은 영진은 자기의 뜻을 이룰 수 없음과 부모의 자기에 대한 장래의 두려움을 보다 못해 나라 망함을 탄식한 나머지 원대한 포부를 이루지 못한 채 19세의 꽃다운 나이로 자결하고 말았다.


 그런데 천리인지 조화인지 예천군 보문면 작곡동 속칭 읍실 소에서 젊은 장수 우영진을 태우고 천하를 호령하는 용마가 솟아나 우영진이 거주하는 창마을을 향해 오던 중 지금 예천군 보문면 오암동 속칭 오치마을 앞에 와서 자기 주인인 영진의 자결 비보를 듣고
용마는 하늘을 우러러 보며 크게 세 번을 울부짖다 그 자리에서 숨졌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우장군과 용마는 하늘이 내리신 것인데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기며 이 용마의 시체를 오치 마을 뒷산에 장사 지내니 지금도 이 무덤터를 말무덤이라 부르고 있다.

관련자료

댓글 0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